_ 텅빈 집현전 _
세종의 눈물
학사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집현전
텅 빈 집현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보인 세종
" 집현전 학사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
슬픔에 찬 세종의 곁을 지킨
영의정 황희
" 소신이 가서 학사들을 달래보겠습니다. "
태조 때부터 이어진 억불정책에 따라
세종의 " 내불당건립 " 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신하들
집현전의 학사들과 성균관의유생들 또한
연일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1448년 7월
경복궁에 내불당을 재건립을 명한 세종.
사부 학당의 학관이 와서 고하기를
" 생도들이 불당을 피하기를 청하다가
뜻을 얻지 못하므로
모두 학업을 파하고 흩어져 갔습니다 " 하였다
_ 세종실록 1448년 7월 23일 _
성균과 학생들의 동맹휴학 단행.
조선 시대
학생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
1. 권당
식당 들어가지 않기
2. 공재
기숙사에서 나오기
3. 공관
성균관 비우기
특히 공관이 발생하면
서울 시내의 상점 또한 파업에 돌입.
왕은 학생을 복귀시키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세종 시대 일어났던 고오간 당시에도
영의정 황희가
학사들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 설득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명종 6년(1551년)1월2일
불교의 양종을 세운다 하여 공관을 단행.
광해군 3년 (1611년)4월10일
유생 처벌의 가혹성,부당성을 이유로 공관을 단행
효종 1년(1650)년 7월3일
영남 선비 유직의 처벌이 부당하다며
공관을 단행.
조선시대 공관 및 권당 발생 수
총 182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민본사상을 근간으로
여론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
공론 정치를 따르며
다양한 언론 통로를 마련했던 조선왕조.
조선왕조는 제도를 통해
언론과 학원의 자유를 보장했고
그 중 유생의 공관은
왕권에 대한 가장 적극적 견제 수단이자
가장 강력한 시위 수단이었다.
그러나
강력했던 왕권이 쇠퇴하고
관료들의 분열이 심화하던 조선 후기.
학생들의 공관은
당쟁에 편승해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는
소모성 운동으로 변질한다.
출처 : 역사채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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