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녀의 생활은 어땟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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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조선시대 궁녀의 생활은 어땟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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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커리어우먼 궁녀






1420년(세종2년)1월9일


인덕궁에 있는 그녀들의 생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월급을 주어

생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땅히 식사와 함께

방자, 취반인, 급수인 등을 주어야 한다.




이모든 편의를 누린

관노비 출신의 여인, 궁녀





궁궐의 모든 살림을 담당했던

정5품 상궁

상궁 하위직급  시녀


이들을 통틀어 부른 이름

" 상궁시녀인 궁녀 "





궁녀는 내명부 품계를 받은

조선 유일의 여성 관직자로

왕족을 전담해야 했던 까닭에

그 선발기분부터 까다로웠다.



궁녀는 오직 여러관서에 소속된 관노비로만 뽑아 들인다.

양인 여성은 일절 논하지 않는다

[ 속대전 ] 형전 공천조





관노비 가운데 조상, 친인척 중

죄인과 병력 없는 집안의 아이로

각 처소의 필요에 따라

보통 4~13세 여아를 수시로 선출하여

그중 10세 이상의 처녀성 판단을 위한

앵무새 피 감별법을 시행하여

최종 선발된 아이는

수습궁녀, 생각시라 하였다.





왕과 왕비의 각종 궁중의례를 보필하고

잠자리를 책임지는 지밀





왕실가족의 옷과 침구류를 짓는 침방

의복과 장식물에 수를 놓는 수방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는 세수간

세탁 전반을 담당하는 세답방

음료과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

수라상 및 간식, 잔치 음식을 준비하는 소주방 등





각 부서에 배치된 생각시는

도제식 교육과 현장식습으로 일을 터득





생각시 생활 15년이 흐를면

신랑 없는 결혼식인 계례식과 함께

정식 궁녀, 나인으로 승격된다.


또 다시 15년이 지나서야

상급궁녀, 상궁에 오르게 된다.


입궁 후 평생을 궁에서 보내야 했던

궁의 여인, 궁녀






그러나,

때로는 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출궁 되기도 하였다.


하나, 모시던 상전과 운명공동체로

상전이 둑어 3년 상을 치근 경우


둘, 중병에 걸리거나 고령등으로

더는 일할 수 없는 경우


셋, 나라에 극심한 가뭄이 들거나

큰 변란이 있는 경우

강제 방출되었다.





궁녀 25인을 내보냈으니,

이는 가뭄 때문이었다.

[ 조선왕조실록 ] 1685년(숙종11년)2월29일






그뿐만 아니라

궁녀는 평생 왕만의 여자로서

출궁한 후에도 절대 혼인할 수 없었다.



조정의 관리로서 궁중에서 내보낸 궁녀를 

데리고 사는 자는 장 100대에 처한다

[ 경국대전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8시간 일하고 하루 쉬는 격일제로

비교적 좋은 근무환경과

쌀, 콩, 북어와 같은 현물 월급과

때로는 특별 상여금까지 하사받으니

당시 궁녀는 고액 연봉자로

백성들 사이에 원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특히 처소별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단 한명의 최고수장, 제조상궁





양반 관료 정2품에 준하는 높은 월급은 물론

박강한 영향력을 가진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약 600명으로 500여년의 궁궐을 지킨

왕실살림꾼, 조선의 궁녀는

단순노동자가 아닌

조선왕조와 궁중문화를 유지시킨 왕실전문가였다.






출처 : 역사저널e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궁녀 >

<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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