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돈의문
2010년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존 처리되어 있다가
한양도성의 세계문화유산 추진 과정 중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받게 된
커다란 현판
' 신묘년(1711년) 11월 15일 유학 조윤덕이 쓰고
기사년 (1749년) 2월 18일 영건소에서 개조 '
_ 현판 뒷면 음각 _
그리고
현판의 앞면
도타울 돈
옳을 의
문 문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현판,
그것은 한양의 서쪽 대문
돈의문이 남긴 유일한 표식이었다.
동서남북 4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문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한양의 도성
그 중, 한양의 서쪽을 지킨 돈의문
하지만
"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은 지역의 지맥을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사람과 말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
[ 조선왕조실록 ] 1413년(태종13) 6월 19일
돈의문은 풍수지리적인 문제로
위치를 조금씩 옮겨,
헐렸다가 두차례 새로 지어진다.
그리고 1422년 세종 4년
세번째로 다시 세워진 돈의문
세종은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로
돈의문을 옮겼고
이후부터 돈의문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 간선도로의 시발점이자
외교 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으로
밤 10시에 닫고 새벽4시에 열리며
490여년간 서쪽 대문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15년
형체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돈의문
그 배경에는
일제의 전차궤도 복선화가 있었다.
당시 마포에서부터 돈의문,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운행되었던 한양의 전차 노선
전차가 지나는 돈의문과 동대문은
전차선 확장 공사를 진행하려는
일제의 걸림돌이 되었고
시구의 개정으로 인해 총독부는
경성 서대문(돈의문)을 헐기로 결정하였다.
_ 매일신보 1915년 3월 7일 _
그러나
동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을 없애 전차 노선으로 유지하였다.
또한
총독부 토목국 조사과에서는 돈의문의
경매 입찰을 진행하였고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낙찰되었다
_ 매일신보 1915년 3월 7일 _
강제로 헐린 돈의문을 두고
일제는 경매를 진행해 이익을 남겼으며
돈의문의 석재와 목재뿐 아니라,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까지 무너뜨려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하였다.
그런 까닭에 성곽도시였던
옛 서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려버린 후
다른 대문과 달리 다시 세워지지 못한
비운의 서쪽 대문, 돈의문
현판과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돈의문의 옛자리에는
현재 '돈의문 터 ' 라는 표석만이 있을 뿐이다.
2009년 정부는 2013년까지 돈의문의 복원을 예정하였지만
과거 문화유산의 복원과
현실의 타협 사이에서
돈의문 복원은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져 있다.
출처 : 역사저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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