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여성 엘리트 _ 콩나물 팔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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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조선 최고의 여성 엘리트 _ 콩나물 팔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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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팔던 여인의 죽음

_  조선 최고의 여성 엘리트  _







1932년 4월24일

일간신문고에 실린 부고 기사.


최영숙 씨,

지난 23일 자택에서 별세

_ 동아일보 _


스물일곱, 젋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인.



신문에 부고 기사까지 실린 그녀의

의외의 정체는


서대문 밖 거리에서

콩나물을 판던 여인이였다.


1905년 경기도 여주 출생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중국 회문 여학교에서 수학


192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조선의 여인이였다.


[ 1926년 7월 23일 동아일보 ]





방년 22세 된 최영숙 양은

하얼빈에서 유럽-아시아 연결 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으로 향하였는데

그녀가 만리타국에 간 이유는

오직 고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마음뿐이였다..





동양인 최초,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녀.





당시 언론은 조선 최고의 여성 엘리트

최영숙씨의 귀국 소식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러나


" 조선으로 돌아와 몸을 던져

살아있는 경제학을 실천해 보려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보니 형편이 어려워

당장 취직이 걱정입니다. "


[ 조선일보 중 ]





1920년대 말 찾아온 세계 경제공항.

전문학교, 대학교를 졸업해도

약 절반가량이 취업할 수 없던 시대.





힘겨운 경제 상황 속에

일제강점기, 더욱 차별받았던 조선인의 취업.


조선 여성은 옛 인습과 제도에 얽매여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했다.





어려서는 식모로, 민며느리로 끌려가고

커서는 기생으로 팔려간다.


설령 공장 직공, 버스 차장, 전화교환수가  돼도

남성 같은 임금은 받을 수 없었다.







5개 국어 구사, 조선 여성최초의 경제학사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지만,

조선인, 여성이었던 최영숙은

그 어느 곳에도 취업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배추, 감자,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당시 스톡홀름 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힘겨운 생활 속에 

건강까지 나빠진 그녀는

귀국한지 5개월 후인 1932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 남녀평등권이 실현된 그들의 생활...

외국여성들의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사회활동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


[ 최영숙 ]







출처 : 역사채널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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