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철처한 관리를 받아야 했던 조선시대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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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철처한 관리를 받아야 했던 조선시대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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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철처한 관리를 받아야 했던

조선시대 광대











광대의 다양한 이름

뛰어난 사람, 우인

영리한 사람, 영인

재주를 부리는 사람, 재인


재주를 부리며 팔도를 유랑했따던

자유로운 예인, 광대



그러나,

연산군의 사랑과 미움을 받았던

왕의 남자, 재인 공길 등

조선의 광대는 단순 유랑예인이 아닌

국가의 전문 예술인이었다.







전국에 있는 재인들의 교육과

관리를 담당한 재인청 소속으로

궁중의 나례희, 중앙과 지방의 산대희

과거 급제자의 축하연 등

광대는 각종 공식 행사를 위해

관이 확보한 고급 연희 집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났던 자리

중국 사신 환영연


번쩍이는 금빛 허리때 붉은 옷에 빛나는데

거꾸로 매달렸다 몸을 날리니 새가 나는 듯하다

성현 < 관괴뢰잡희 >



줄타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

현대 서커스 수준의 공연으로

사신을 놀라게 한 조선의 광대는

일종의 문화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보지 못함은 물론

토지조차 가질 수 없었던 특수 신분으로

재인촌(광대촌)에 모여 살며

연희 준비와 공연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행사가 없을 시 농,상,수공업을 통해

열악한 경제난을 극복해야 했고

매년 출생, 사망, 도망조사 등

국가의 철저한 관리를 받아야 했다.






또한 세종때부터

신량역천으로 규정

( 양인의 신분으로 천한 일을 한다 )


대부분 신백정으로 편입되고

재주를 팔아먹는 재백정으로 불리니

나라의 중요 인력이었던 광대는

빈궁과 멸시의 대상으로 천민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국방을 지키기 위한 군사로 차출되었다


병선이 대마도 정벌로 나가 

각 포구의 방어가 허술하니...

명령하여 갑사,별패 및 재인(광대)등 방어에 나가게 하소서

[ 조선왕조실록 ] 1419년(세종1년)6월2일






때로는 전국의 백성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주는 에너지원으로

때로는 사회적 문제를 임금께 고하는

연극배우로 활약하며




광대의 화극은 구중궁궐의 임금이

민심 파악을 위해 허락한 일종의 언로로

이후 서사적 재담과 성악적 소리가 더해져

한국 공연의  꽃 판소리로 발전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는 광대, 사당패는

불교탄압과 생활고 등으로 생겨난

유랑예인집단으로

이는 관청 소속인 조선의 광대와

엄연히 다른 부류였다.




출처 : 역사채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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