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죽음의 진실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
1762년 (영조38년) 윤 5월 13일
이른 아침
영조를 찾아온 세자의 생모 선희궁
몇 시간의 알현이 끝난 후
" 세자를 폐위하라! "
마침내 영조는 세자의 폐위를 결단한다.
사도세자의 본명
" 이선 "
이선은 영조가 맏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만 7년만에 얻은 귀한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칭해지고
2세 때 조선 시대의 최연소 세자에 책봉된다.
혈맥을 다시 잇게 되었으므로 종묘에 뵐 면목이 섰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 조선왕조실록 ] 1735년(영조11년) 1월 25일
돌 무렵부터 보인 총명함과 영특함 등
차기 임금으로서 타고난 자질을 지닌 세자 이선은
분명한 영조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8세에 본격적인 왕세자 교육이 시작된 후
세자의 태도가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학문보다 그림그리기, 무예, 잡서를 즐기며
식성이 좋아 몹시 살이 찌고
세자의 배를 좀 보라, 나는 그때 이렇지 않았다.
지난번에 보니 세자가 비대해 가마가 좁아 탈 수 없었다
[ 승정원일기 ] 1746년 6월 24일 26일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15세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세자는 그만한 일을 혼자 결정하기 못해
내게 번거롭게 물으니 대리청정을 시킨 보람이 없다
혜경궁 홍씨 [ 한중록 ]
부족한 세자를 향한 영조의 질책은
신하들 앞에서도 몸추지 않았다.
전하께서 항상 너무 엄격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세자께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 조선왕조실록 ] 1758년(영조34년) 7월8일
영조는
미천한 무수리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며
평생 불안함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왕으로
영조가 바라던 임금의 모습과 멀어지는
세자에 대한 실망이 클수록
꾸지람과 성냄, 조롱이 극에 달하니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후부터 병이 생겨 본성을 잃었고,
임금이 매번 엄히 꾸짖으니 걱정스럽고 두려워 병이 더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1762년(영조38년) 윤 5월 13일
세자의 병
사람을 두려워하는 경계증
천둥, 벼락 소리를 무서워하는 뇌벽증
옷차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의대증
그 외 헛것을 보거나 살인, 자살시도 증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고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니
불에 달궈 지지는 형벌 등 갖은 악형을 가했습니다.
[ 폐세자반교 ]
많은 수의 궁녀와 기생, 여승과 관계를 맺는 등
세자의 방탕한 생활이 지속되자
1762년 (영조 38년) 5월22일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게 된다.
하지만
상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을 뿐
세자의 죽음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세자의 생모가 영조에게 직접 고한
세자의 죄목은
임금의 목숨을 노리는 반역죄.
이에 분노한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며
폐세자반교를 공표하고
축복받으며 태어난 세자는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
당쟁의 희생양이었다고 알려진
" 사도세자 "
그 죽음에 관한 또 다른 진실이 이었다.
출처 : 역사저널e